I 칼럼 論 I 정부가 지금 '라이콘' 얘기할 땐가?

700만 소상공인이 벼랑에 몰린 지금 뜸금없는 라이콘 육성 타령
정책 기획의 근거가 빈약하고 현실성 떨어져

신진욱 편집인 승인 2023.05.21 21:45 | 최종 수정 2023.06.15 22:10 의견 0

정책을 입안하는 공무원의 가장 큰 고민이 정책수혜의 폭과 깊이다. 폭을 좁혀 소수를 깊게 지원하면 다수가 불만이다. 깊이는 포기하고 폭을 넓혀 다수를 지원하면 지원액이 적다고 불만이다.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넓게 퍼지고 천천히 깊게 스며들어 모두를 적시는 보슬비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

중소벤처기업부는 17일 ‘기업가형 소상공인 육성방안’을 발표했다. 핵심은 소상공인을 기업으로 바라보고 기존의 단순 ‘보호’나 ‘지원’이 아닌 ‘육성’ 하겠다는 것이다.

창의인재를 양성해 좋은 아이디어로 창업하도록 지원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고도화해 성장과 스케일업에 성공하도록 지원한다. 정책안은 “세계로 뻗어 나가는” 글로벌 진출까지 야심 차게 담고 있다.

정책의 백미(?)는 기업가형 소상공인의 잠재력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며 ‘라이콘’(LICORN)이라는 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라이콘(LICORN = Lifestyle & Local Innovation uniCORN)은 라이프스타일과 지역을 혁신하는 유니콘 기업(기업가치가 1조원으로 평가받는 비상장기업)이라는 의미다.

기자도 이런 류의 단어 만들기를 좋아하지만 라이콘이란 작명은 억지가 심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게다가 700만 소상공인과 자영업자가 코로나-19와 경기침체로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지금, 청년층에 초점을 맞춘 기업가형 소상공인 ‘라이콘’을 육성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한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다. 현실의 문제는 생존인데 정책은 로또 1등 당첨 확률과 비슷한 ‘스타만들기’에 한 눈을 팔고 있다.

유니콘 기업이 되라는 덕담은 이미 스타트업계에서도 립서비스가 됐다. 기초 다지기 없는 퀀텀 성장을 꿈꾸기보다 지속가능한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생활과 지역을 키워드로 소상공인을 글로벌 시장까지 진출하는 유니콘 기업으로 육성하겠다며 수십가지 방안을 쏟아낸 중기부의 빈약한 현실 감각은 문제가 크다. 정부의 정책 헛발질에 소중한 국민세금 수백억원이 사라질까 벌써 걱정이 앞선다.

생활 서비스 플랫폼은 네이버, 카카오, 쿠팡 같은 초거대 IT 대기업이 시장을 선점한 영역이다. 상품 제조는 대기업의 품질, 가격 경쟁력이 월등히 앞선다. 쇼핑 플랫폼에 입점해 상품을 판매하는 소상공인의 수가 300만명에 달하고 억단위 매출을 내는 소상공인 숫자가 늘어났다는 것이 ‘라이콘’ 가능성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지역을 키워드로 잡은 것도 근거가 빈약하다. 잦은 이사와 아파트 거주로 이웃문화, 동네문화가 사라진 우리나라에서 소상공인이 지역 기반으로 유니콘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하기 그지없다. 지역 네트워크가 더 취약한 청년층을 창업시켜 라이콘을 육성할 수 있다는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17개 광역시도와 260개 기초 시군구 5055개의 읍면동까지 너도나도 지역 이름만 앞세운 비즈니스 모델을 들고 나온다면 지역 기반 브랜드에 대한 관심은 떨어지고 소상공인끼리 경쟁만 치열해질 것이다.

기업가형 소상공인의 스케일업을 민간 혁신가가 주도하도록 지원체계를 정비하겠다는 내용도 문제가 있다. 수수료 챙기기에 급급한 정부지원금 컨설팅 업체들이 발빠르게 상권기획자로 옷을 갈아 입을 게 뻔하다. 기자의 업계 경험으로 볼 때 정작 소상공인에게 필요한 진짜 상권기획자는 정책 실행과정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

중기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이번 정책을 실행하면서 소수의 성공사례 만들기보다 지원사업에 선정된 소상공인의 대다수가 지속가능한 사업의 기초체력을 쌓도록 지원하는데 예산과 행정력을 집중해야 한다. 경험과 지역 네트워크가 부족한 청년층끼리 팀빌딩하는 것은 지양하고 세대간 결합이나 연고가 있는 지역에서 창업하도록 유도하는 치밀한 관리가 필요하다. 해외 진출은 제품별, 지역별로 우수 소상공인을 한데 묶어 코트라가 직접 대행하는 것이 경쟁력과 실효성 있는 방안이다.

정부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거나 좋은 학벌에 운까지 따라 줘 성공한 극소수 소상공인의 사례를 일반화하는 정책 오류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700만 소상공인들에게 동기부여가 아닌 박탈감을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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